보색의 색채와 유기적 형태를 통한 놀이성의 발현
윤 진 섭 ㅣ 미술평론가
1995년 이후 14회의 개인전을 연 중견조각가 김태수가 면밀한 구상과 계획 하에 신작을 발표한다. 표 갤러리에서 열리는 이번 개인전은 3개의 전시실 전체를 사용하여 최근 2-3년간에 걸쳐 구상하고 제작한 회심의 대작들을 선보일 예정이다. 그녀는 본래 부드럽고 서정적인 인체조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나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채색된 유기체적 추상조각으로 변신한 후, 탄탄하고도 참신한 조형력을 갖춘 현대 조각가로 화단에 각인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따라서 이번 전시는 어느덧 20여 년을 훌쩍 넘긴 이 작가의 전 경력에서 중반부의 완숙기에 도달한 시점에서 다시 한 번 전 역량을 싣는, 중간 결산의 매우 중요한 전기(轉機)가 될 것이다.
김태수에게 있어서 싹, 풀, 나무, 열매와 같은 자연물의 형태를 단순화시켜 현대적 미감이 물씬 풍기는 세련된 형태의 유기체적 추상조각이 본격적으로 발현된 것은 2009년 무렵의 ‘Eco Flow’ 연작에 이르러서이지 않나 생각한다. ‘생태의 풍부한 흐름(몰입)’이라고 번역되는 이 ‘Eco Flow’란 용어는 김태수의 조각을 관류하는 키워드이면서 그의 관심사를 대변해 주는 말이다. 이는 이 작가의 사유가 대지에 뿌리를 둔, 그래서 오늘날 지구촌의 위기가 환경파괴에 기인한다는 깊은 자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주와 대지의 순환작용에 사유의 뿌리를 두고 흙을 존중하는 생명사상에 관심이 많은 김태수는, 그 생명이 발아할 때의 순간적 형태를 작업의 기초로 삼음으로써 자신의 작업이 이 초유의 지구촌 전체의 이슈와 맞닿아 있음을 피부로 느끼고 있다. 따라서 전시장 바닥에 수평을 이루며 전개되는 조각품의 형태(1층 전시실)나 벽에 파상(波狀)의 연속적인 무늬를 그리는 흰 색의 거대한 부조(2층 전시실), 식물의 열매를 연상시키는 크고 작은 환조 작품들(3층 전시실)로 각기 다르게 구성된 전시장 풍경은 무한한 신비와 거대한 힘을 가진 자연에 대한 조형적 유비(analogy)라고 할 수 있다.
얼핏 보면 단아하고 예쁜 색상들의 반복적 조합으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모더니즘 추상 조각품으로 간주될 수 있으나, 그 의미를 곰곰이 되새겨 보면 관람객들은 김태수의 조각에서 표면적으로 눈에 보이는 형태미의 이면에 숨겨진 중요한 의미를 포착할 수 있다. 그 의미 전환의 단서가 되는 것이 바로 ‘생명, 자연, 호흡, 공유, 순리, 존재, 희망’과 같은 단어들이다. 김태수의 작업노트에서 수집한 이 단어들은 작품을 보는 관람객이 작품의 색채와 형태를 접하는 순간, 연상 작용에 의해 감각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단어들이다. 이는 곧 작가와 관람객 사이에 감정의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부분이거니와, 비록 이해의 측면에서 고난도의 단점을 지닌 추상조각이라고는 해도 그 보편적 미감, 즉 칸트(I. Kant)가 이야기하는 ‘공통감(共通感)’의 측면에서 볼 때는 만인의 즐김이 가능한 것이다.
철판을 기하학적 형태로 잘라 용접한 후 서로 보색 관계를 지닌 색상으로 분채 도장을 한 김태수의 조각은 쾌적한 세련미를 지니고 있어 현대 건축물에 잘 어울리는 장점이 있다. 리드미컬한 곡면의 조합은 원만한 질서 속에서 화합을 낳는 심리적 작용을 불러일으킨다. 싹, 열매, 꽃, 나무, 풀 등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식물의 형태를 연상시키는 김태수의 조각은 생장의 신비를 조형적으로 포착한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순간의 미학’이다. 꽃이 피는 순간, 싹이 동토(凍土)를 힘차게 뚫고 올라오는 순간, 꽃이 피는 순간, 열매가 벌어지는 지고의 순간을 김태수는 조형화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들은 유기적인 곡선으로 표현된다. 그것의 모티브는 마치 죽순이 올라오듯 용틀임하는 생장의 순간들이다. 바람처럼 비가시적 자연의 현상에서부터 끊임없이 순환 반복하는 파도의 일렁임에 이르기까지 자연의 원초적 움직임은 김태수 작업의 중요한 모티브가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김태수의 작업을 관류하는 ‘놀이적 성격(유희성)’ 이다. 작가는 자연에서 빈 모티브건, 자신의 의식이건 작업과 관련된 모든 것들을 풀어헤치고자 한다. 요한 호이징가(Johan Huizinga)가 모든 문화와 예술에 내재한 고유의 특징으로 든 ‘유희하는 인간(Homo Ludens)’의 정신이 김태수의 작업에도 깊숙이 내재해 있다. 단지 조각의 형태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쉽게 느껴지지는 않지만, 자세히 보면 리듬감이 유발하는 놀이적 특성을 관객들은 공감하게 될 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