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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기(生氣)의 조형적 현현

이 선 이 ㅣ 시인, 경희대 교수

1.
현현(epiphany)은 우리가 일상적 삶의 한 순간에 경험하는 영원하고 고귀한 것의 돌연한 출현을 뜻한다. 기독교에서 신이 그 존재를 드러내는 경축일을 뜻하는 이 용어는, 오늘날 예술에서 중요한 미학적 기법으로 사용되고 있다. 흔히 원어 그대로 에피파니로 불리는 현현은, 예술을 통해 비루한 우리 삶을 고양시키는 미적 기법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 현현은 미혹한 영혼을 일깨우는 깨침으로 다가오기도 하고, 우리 안에 내재하는 신성을 자각하는 순간이 되기도 하며, 때로는 더 크고 존엄한 존재자를 발견하는 숭고의 감정으로 계시되기도 한다. 그 양상이 어떠하든 현현은 왜소하고 불안한 우리 인간이 더 깊고, 더 높고, 더 큰 세계를 향해 스스로를 열도록 도우며, 이 존재의 열림을 통해 우리는 충만한 삶의 기운을 충전하게 된다.
김태수의 조형세계에서 우리가 받는 인상과 미감은 이러한 현현의 순간으로 다가온다. 이곳으로 초대받은 우리는 어김없이 어떤 돌연한 현현을 체험하게 되는데, 이 순간들은 보이지 않는 생명의 기운을 품고 있어서 우리 안에 잠들어 있는 우주적 생명감각을 깨우는 발견의 시간을 제공한다. 자연과 우주를 가득 채우고 있는 생기(生氣)의 조형적 현현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 이 세계에서, 우리는 강렬한 생명적 에너지에 감전되는 것이다. 전율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이러한 미적 체험은, 몸의 느낌(feeling)으로 전해오는 생기의 솟구침이자 생명을 향한 도약이라 할 수 있다. 이 느낌의 진앙지와 그 강도를 묻는 일이야말로 김태수의 조형세계를 해명하는 패스워드가 아닐까 싶다.


2.
작가는 자연과 우주를 관류하는 생명의 기운과 교감하고 소통하는 일종의 생기 커뮤니케이터이다. 마치 말할 수 없는 동물과 교감하고 소통하는 애니멀 커뮤니케이터처럼, 작가는 자연의 생명적 기운을 자신의 조형언어로 번역해낸다. 실제로 작가는 도시를 떠나 가평의 북한강변 산자락에 거처를 마련하고, 그곳의 꽃과 바람, 강과 나무, 흙과 구름을 상상의 촉매이자 사유의 집으로 삼고 있다. 이처럼 작가가 자연 속에서 생활하며 자연으로부터 작품의 모티프를 발견하고는 있지만, 자연현상 자체를 소재나 주제로 다루며 자연예찬에 몰두하는 작업 스타일과는 일정한 거리를 보이고 있다. 자연의 드러난 현상을 탐색하는 방식과는 달리, 김태수는 현상의 이면에 드리워진 생명의 기운을 형상화하는 데 조형적 감각을 집중한다. 드러난 자연의 질서 이면에 놓인 보이지 않는 더 큰 질서를 포착하고, 우주에 충만한 생명의 기운을 조형언어에 새겨 넣고 있는 것이다. 2009년에 시작된 「Eco Flow」 시리즈에서부터 작가는 이러한 생기전달자로서의 역량을 집중적으로 뿜어내고 있는데, 작가가 어떻게 자연과 우주의 생기를 포착하고 이를 전달하는지 살피기 위해 이번 전시에서 두드러지게 강조되고 있는 중심 이미지를 중심으로 그 미학적 방법을 탐문해 보면 이러하다.


3.
「Nature’s Secret」라는 이번 전시에서 우주적 생기를 구체화하는 조형언어는, ‘품다’와 ‘솟구치다’와 ‘흐르다‘라는 동사적 이미지에 집중되고 있어 이채롭다. 생태감각을 강하게 담아낸 이전의 전시에서도 빈번하게 다루었던, 싹과 꽃, 물결과 바람결이라는 자연심볼은 이번 전시에서도 반복되며 변주되고 있다. 하지만 이번 전시에서는 이를 보다 단순화하고 추상화함으로써 생태계 내부를 채우고 있는 살려는 의지로서의 생기를 돌올하게 드러낸다는 점이 눈에 띈다. 여기서 특징적인 면은 이러한 기(氣)의 충만을 표상하는 이미지가, 싹이나 꽃 또는 물이나 바람이라는 명사로 포착되기보다는, 품고 솟고 흐르는 동사로 포착된다는 점이다. 동사의 이미지화, 이것은 작가가 우주만물 속에 내재하는 기운생동하는 생명적 에너지와 어떻게 접속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열쇳말이기도 하다.


가령 「Calm and Passion」이라는 작품 앞에서 우리가 갖게 되는 미적 경험을 따라가 보자. 언뜻 보면 물방울이 창문에 매달려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주는 이 작품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마치 땅속에 묻힌 씨앗이 싹을 틔우려고 발아의 기척을 하고 있는 상상에 동참하게 된다. 이 상상은 작품 앞에 선 우리를 새싹이 돋아나기를 기다리는 순정한 아이의 시간으로 데려다 주는데, 이 과정에서 우리 몸에는 어떤 생기가 샘솟기 시작한다. 「Breeze in the Forest」나 「Sweet Whispering」뿐만 아니라, 이 작품들 보다는 구상성이 강화된 「Spring Letter」나 「Perfect Rhythm」이라는 작품 앞에서도 우리는 동일한 상상의 열림과 떨림을 경험하게 된다. 이번 전시에서 감추어진 생명의 기운을 포착하는 작가의 시선은, 달콤한 속삭임을 담은 부드러운 생기로 표현되기도 하고, 생동하는 환호성을 담은 역동적인 생기로 분출되기도 하며, 때로는 사막에 내린 비에 담긴 고요한 생기로 그려지기도 하는데, 그 양상은 얼마간의 차이를 보이지만 생명 에너지를 형상화하는 동사적 이미지에 대한 집중은 동일하게 드러난다. 우주적 생명의 기운을 품거나 이러한 기운이 발현되는 솟구침의 이미지는, 씨앗에서부터 싹과 꽃으로 변주되면서 김태수의 조형세계가 생기를 포착하고 전달하는 중요한 미적 방법이 된다.


이와 함께 작가의 조형언어에서 중요한 술어가 되는 동사적 이미지는 ‘흐르다’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이미지는 변화에 대한 감각을 담아내는 데 일조하고 있다. ‘흐르다’는 그 형상화의 대상이 바람에 국한되지 않으며, 작가의 조형세계의 근원적인 주조음(主調音)이 되고 있다. 바람은 흐르는 물의 형상으로 다가오며, 솟구치는 싹은 대지를 향해 흐르는 물처럼 휘돌면서 솟구친다. 품고 솟는 수직적 이미지에서도 발견되는 이러한 유연한 흐름의 수평적 이미지는, 작가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세계가 어디인가를 가만히 말해준다. 이 이미지 앞에서 우리는 노자가 󰡔도덕경󰡕에서 말한 도(道)에 가깝다는 물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도덕경󰡕에서 물의 이미지는 무위자연을 향한 조용한 순응의 이미지라면, 생기전달자로서 작가 김태수가 포착하는 흐름의 이미지는 좀 더 역동적인 변화의 낙폭을 감당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이런 점에서 작가의 우주생기에 대한 감수성은 노장의 세계보다 더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듯하다. 세계의 존재상을 변화로 읽어낸 시각은, 동양에서 고전의 고전이라고 불리는 󰡔주역󰡕에서부터 발원했다고 알려져 있다. 우리가 작가의 작품에서 바람의 자취나 물결의 흔적을 만나게 되는 것은, 작가가 지향하는 세계가 󰡔주역󰡕에서부터 우주적 근원질서로 인식되어 온 ‘변화’를 사유의 거처로 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생기와 변화는 인간과 자연을 포함한 세계 전체의 내용과 형식으로 공존하고 있고, 우주의 보이지 않는 질서를 형성하는 생명 에너지는 변화를 본바탕으로 삼아 흐르고 있다. 따라서 김태수의 조형언어인 ‘품다’와 ‘솟다’ 또한 ‘흐르다’라는 생기의 흐름을 바탕으로 삼아 그 이미지를 구체화해 나간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이처럼 김태수의 조형세계가 빚어내는 감동의 진앙지는 ‘흐르다’라는 동사적 이미지에서 발견된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이 흐름의 동사적 이미지는 물질 자체의 본원적 속성인 운동성을 담아내고 있다는 점에서 일층 근원적인 존재의 실상을 환기해낸다.


현대물리학의 주류인 양자물리학에 따르면, 우리가 보는 물질은 입자이면서 동시에 파동이다. 물질이 입자라는 사실에는 쉽게 수긍이 가지만 파동이기도 하다는 사실은 다소 충격적이다. 인간의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물질이 파동이라면,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내부적으로 리드미컬한 운동성을 갖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원자 차원에서부터 비롯하는 이 운동성을 확대해서 우주적 차원에 적용해 보면, 일종의 우주적 리듬을 상상해 볼 수 있다. 우리가 이러한 운동성을 체감해 볼 수 있는 이미지의 하나가 바로 바람이다. 바람은 보이거나 잡히지 않지만 분명한 존재성을 드러내기에, 드러난 질서 이면의 숨겨진 질서를 비유하는 상징으로 오랫동안 인식되어 왔다. 물과 함께 바람은 정지와 단절이 아니라 흐름과 연속이라는 이미지로 종종 포착되는데, 이 바람의 이미지는 이번 전시에서 작가의 조형언어가 빚어낸 미감의 원천이 되고 있다. 바람으로 상징되는 흐름의 이미지가 물질의 내부에 존재하는 파동에서부터 비롯하는 생명의 근원적 율동을 닮았다는 사실은, 지난 이십 년 동안 지속되고 있는 작가의 조형세계가 왜 그토록 흐름이라는 동사적 이미지에 집중되어 왔는가를 해명하는 실마리가 된다. 작가의 작업은 원자 단위에서부터 내장하고 있는 생명의 역동적인 파동을 생명기운(vital energy)으로 포착하는데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부드럽게 휘어진 형상의 결들은, 마치 수면에 파랑을 일게 하는 바람의 흔적이자 매끄러운 물의 표면을 떠올리게 하는데, 이 부드러운 운동감은 생명 일반이 가진 내면의 운동성과 결부되면서 무한의 우주를 향한 생명의 도약을 감행하고 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4.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헤르메스의 발뒤꿈치에 돋아난 날개를 보면서 의아하게 생각한 적이 있다. 하필이면 발뒤꿈치일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상상력의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는 고립된 인간이 무한의 세계로 자신을 확장하기 위해서는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는 물·불·공기·흙의 기본 물질이 어떻게 변형되어, 우리의 의식에서 상상의 날개를 펼치는가를 여러 예술작품을 통해 읽어냈다. 그의 주저 중 하나인 󰡔공기와 꿈󰡕에서는 날아오르는 꿈의 주인공에 대해 언급하는데, 여기서 그는 우리가 ‘날아오르기 위해 필요한 힘은 날개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발에 있다’고 선언한다. 이 말은 헤르메스의 발뒤꿈치에 달린 날개 이미지를 보면서 가졌던 의문을 풀어주기에 충분했다. 그는 신화 속 헤르메스의 날개는 발뒤꿈치에 아주 작게 그려진다고 말하며, 우리의 상상은 날개로 날아오르는 것이 아니라 도약을 통해 비상하는 것임을 말해준다. 물론 헤르메스는 날개달린 모자도 쓰고 다녔지만, 바슐라르는 솟구쳐 오르는 약동과 비상의 이미지를 도약의 힘에서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김태수가 「생명의 소리」 시리즈와 이를 심화시킨 「Eco Flow」 시리즈, 그리고 이 연장선상에 있는 이번 「Nature’ Secret」에서 보여주는 운동성은 바로 이 도약과 연결된다. 씨앗을 품고 싹을 틔우며 바람의 흐름을 담아낸 자연심볼들을 통해, 작가는 우주적 생기를 현현하면서 생명이 도약하는 순간을 포착해 내고 있는 것이다. 이 도약과 비상의 날개는 작가가 걸어온 결코 간단치 않았을 삶의 행로가 만들어낸 선물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작가 김태수는 발목 어딘가에 날개를 감추고 있는 사람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어쩌면 두 발로 살아낸 한 인간이 어떻게 날개를 만들어 왔는가를 실감할 수 있는 시공간에 초대받은 것인지도 모른다.(그러므로 혹시 작가를 만나는 행운이 찾아온다면 그녀의 발에서 돋아난 날개를 찾아보시압!) 그 날개 밑에는 자연철학자나 생기치유자들이 그러하듯, 거대한 우주생명의 일원으로서 이 세계에 동참하는 경이로움과 겸허함이 감추어져 있을 것이다. 이 도약을 이끄는 날개는 자연 자체가 품고 있는 신비이지만, 김태수의 조형세계가 갖는 신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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