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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大地)의 율려(律呂), 세계를 품는 생명의 곡선

김 하 림 ㅣ 평론가, 기획자

1. 미시적 숭고: 일상의 지평에서 발굴한 우주의 향연

조각가 김태수의 ‘ECO FLOW’는 자연의 항구적인 질서와 인간의 순수한 영혼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발아한다. 그에게 평범한 일상은 생활의 터전이자 생명의 성소(聖所)다. 그의 시그니처 조형은 거창한 서사나 기념비적인 풍경이 아닌, 매일 산책하는 길에서 마주하는 들꽃, 담벼락을 타고 오르는 이름 모를 풀로부터 기인한다. “일상생활에서 나의 오감은 활짝 열리고 나를 스쳐 가다가 도전하기도 하는 세상일들은 가슴 벅차게 한다.”는 작가의 고백은 인위(人爲)를 걷어내고 대지의 섭리에 순응하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의 태도와 궤를 같이한다.

작가에게 일상에서 마주하는 자연은 관조의 대상을 넘어 ‘삶을 창조하는 원형’이며 그 속에 자신의 삶을 온전히 투사하고 호흡을 맞추는 소우주(Microcosmos)다. 이는 작가 내면의 여리고 섬세한 연민으로부터 발현한 것이며 지극히 미세한 존재에서 발견한 숭고(Sublime)의 미학이다. 서양 철학에서 칸트가 말하는 인간의 인지 능력을 압도하는 압도적 크기에서 비롯된다는 '숭고'의 개념을 전복시키는 '미세한 것들의 경이'이며 현대적 미학의 실천으로 해석할 수 있다. 작가는 2차원의 금속 또는 하드한 판재를 절곡하고 접합하여 생명의 응축과 팽창을 3차원의 유기적 추상으로 환유한다, 작품에서 나타나는 유동적인 곡선과 유기적인 형태는 씨앗, 세포의 분열이나 식물의 줄기, 혹은 행성의 궤적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이는 '작은 것 안에 담긴 거대한 질서'를 상징한다. 그의 조형 언어는 복잡한 수사를 걷어내고 본질에 집중하는데 반복되는 패턴이나 심플한 조형미는 태초의 혼돈에서 질서를 찾아가는 우주의 생성 과정을 닮아 있다. 작가의 손끝에서 층층이 쌓여 올라가는 조형적 리듬은, 지극히 작은 존재가 지닌 생존의 의지가 어떻게 우주적 스케일의 생명력으로 치환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미시적 숭고(Microscopic Sublime)'의 결정체다.

관람객은 그의 작품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기(氣)'나 '생명 에너지'를 경험하게 되며, 이는 평범한 일상의 편린을 비범한 조형으로 대유한 영성적이고 우주적인 성찰로 이어진다.

 

“작품들은 자연을 구성하는 생명체들을 통해 삶을 창조하는 생명으로서의 이미지를 표출합니다. 이는 베란다의 화초, 담벼락의 풀, 천변 길의 숲, 길 건너 매봉산에서의 체험이고 발견입니다. 유연한 선들의 반복은 보이지 않는 땅의 은밀한 울림을, 중심에 조화를 이룬 원형은 대지 위에 활짝 보인 잎이요, 꽃이요, 열매를 표현합니다.” 2008.9 작가 노트 中 발췌

 

 

2. 생명의 아크(Ark): 모성적 서사와 현대적 구조의 결합

김태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고난도 용접기법, 금속으로는 쉽지 않은 유기적 형상 구현력, 대범하게 절제된 조형미 등을 목도한 이들은 작가가 남성일 것이라고 빈번히 오해하곤 한다. 괄목할만한 대형 공공조형물을 세우고 해외를 무대로 종횡무진 활동하는 진취적 행보와 중성적인 이름은 이러한 오판을 가속한다. 그러나 작품을 면밀히 관조하면 그 기저에 흐르는 잉태의 아우라와 생명을 보듬는 온기를 발견할 수 있다. 한 사람은 하나의 우주이고, 작가는 어머니로서 하나의 우주를 품어본 실존적 경험을 지닌다. 따라서 그의 작업은 단순한 자연의 재현이 아니라, 한 생명을 잉태하고 길러냈던 어머니로서의 ‘몸의 기억’이 예술적으로 발현된 장(場)이다. 작가는 베란다의 작은 화초와 매봉산의 숲에서 씨앗이 외피를 깨고 나오는 찰나를 목격하며, 자신의 몸속에서 생명이 태동하던 그 경이로운 기대와 떨림을 다시금 마주한다. “자연 속의 떡잎은 유사한 모양으로 나오지만, 이내 제각기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는 작가의 통찰은, 생명을 향한 무조건적인 애정과 그 생명체가 온전한 개체로 성장하기를 바라는 숭고한 모성(母性)의 시선과 맞닿아 있다. 자연은 관찰되는 피사체가 아니라, 작가가 겪었던 생명의 고통과 환희가 투영된 거대한 공감의 주체로 기능한다.

그의 조형 언어는 여성 작가 특유의 유연한 수용성을 지니면서도, 이를 압도하는 대범하고 절제된 현대적 구조물로 완성된다. 작품의 곡선은 아이를 감싸는 어머니의 품처럼 부드럽고 따뜻하다. 대지의 어머니가 가진 지층을 닮은 작품의 층위는 만물을 보듬는 여성성의 발현이다. 그러나 작가는 여기에 머물지 않는다. 금속 판재를 다듬고 겹쳐 올리는 정교한 공정은 지극히 이성적이며 대범하다. 불필요한 장식을 걷어내고 본질적인 형태만을 남긴 ‘절제된 미감’은, 연약한 여성성을 넘어선 강인한 생명 의지를 보여준다. 이는 부드러우면서도 꺾이지 않는 생명의 강인함이라는 양가적 가치를 현대적 모더니즘 조형으로 치환해낸 결과다.

 

“나는 자연과 함께 호흡하고, 생명의 소리에 나의 삶을 온전히 내놓으며, 강인한 힘에 나를 맡긴다. 자연 속의 떡잎은 그 어떤 것이나 유사한 모양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만, 이내 그 본 잎은 씨앗에 잠재된 모습을 찾아 제작기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2004.10 작가 노트 中 발췌

 

 

3. 색채의 공명: 빛의 파동으로 발아하는 생명의 소리

김태수의 조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는 단연 ‘색(Color)’이다. 그의 작품에 깃든 색채 언어는 명료하고 강렬하게 발현하는데 그에게 색은 단순한 시각적 장식 또는 조각의 보조 수단에 머무르지 않고 생명체가 세상에 존재감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가 작품에서 발하는 색채는 세상의 에너지가 물질의 옷을 입고 가시화된 빛의 파동으로 작용한다.

우주 만물의 질서와 상생의 원리가 담긴 한국 전통의 오방색이 날실이라면 현대적인 세련미와 서구적 서정적인 감성의 유려한 색감은 씨실이다. 이 날실과 씨실이 직조된 김태수의 색채는 더 이상 개별적인 색의 나열에 머물지 않는다. 원색의 기백과 파스텔의 부드러움이 중첩되면서, 작품의 표면에는 묘한 긴장감과 조화가 공존하는 '색의 향연'이 펼쳐진다. 작품에 닿은 시선이 곡선을 따라 이동할 때마다 색은 빛과 반응하며 매 순간 살아있는 듯한 유기적 생동감을 발산한다.

성 베드로 광장의 무채색 대리석 건축물 사이에서 황, 청, 적의 강렬한 대비를 가진 바티칸 교황청 스위스 근위대의 유니폼은 관람객에게 시각적인 압도감과 경외심을 전한다. 이와 유사하게 김태수의 작품이 야외에 자리하면 무미건조한 광장이나 현대적 빌딩 숲 사이에서 시선을 집중시키는 강력한 시각적 닻(Anchor) 역할을 한다. 작품의 선명한 색채는 주목도와 존재감을 뿜으며 공간에 화사하고 생명력 있는 에너지를 방사한다. 거친 야외에서도 아우라를 가지는 작품은 실내의 전시 공간에서의 시각적 파급력은 더욱 경이로울 수밖에 없다.

다채로운 색채 기교를 통해 관람객의 시각적 경험을 청각적 울림으로 전이시키기도 하고 층위를 가진 색의 띠들은 마치 악보 위의 음표처럼 리듬을 타며 생명의 소리를 빛의 형상으로 치환해내기도 한다. “생명의 소리에 자신의 삶을 맡긴다”는 작가의 말처럼, 그의 색채는 작가 개인의 깨달음이 관람객의 마음으로 전달되는 전도체 역할을 한다. 차가운 물성을 넘어, 색채라는 따뜻한 빛의 언어로 인간과 우주가 어떻게 공명할 수 있는지를 치유의 언어로 보여주는 것이다.

 

“결코 우연으로 돌릴 수 없는 많은 관계 하나하나가 섬세한 실 가락으로 엮어져 내 인생에 소중한 의미를 부여하고 점차 고운 색깔과 선명한 무늬의 천으로 수놓아지면서 내가 한층 성장했음을 감사한다.” 2001.10 작가 노트 中 발췌

 

 

4. 정중동(靜中動)의 미학: 영혼의 건축으로 세운 K-아트의 이정표

조각가 김태수의 작업은 보이지 않는 존재의 본질을 가시화하려는 끈질긴 탐구의 산물이다. 오랜 시간 그가 천착해온 주제인 ‘생명의 소리’가 내면의 파동을 포착하는 과정이었다면, 2009년부터 집중해온 ‘ECO FLOW’ 연작은 그 소리가 우주의 섭리와 만나 유기적인 육신을 입고 세상 밖으로 걸어 나온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조형 언어는 이제 형태의 재현을 넘어, 거대한 우주의 질서와 그 속에 점처럼 박힌 개별적 삶의 여정을 연결하는 미학적 가교(架橋)가 된다.

그의 조각은 정지된 사물이지만, 그 안에는 폭발적인 생명력이 내포되어 있다. 이는 고요함 속에 움직임이 있고, 움직임 속에 고요함이 있다는 정중동(靜中動)의 미학이며 한국적 정서의 뿌리인 ‘흥’과 ‘멋’을 현대적인 ‘K-비탈리티’로 승화시킨 결과물이다. 작가가 빚어낸 곡선과 색채는 동양의 천인합일(天人合一) 사상을 현대 미술의 언어로 번역하여, 인간과 자연, 전통과 현대가 하나의 우주적 질서 안에서 공존할 수 있음을 증명한다.

이러한 태도에 기인한 탓인지 그의 조각은 오늘도 우리 곁에서 가장 낮은 곳의 생명력을 예찬하며, 찬란한 색의 리듬으로, 또는 보이지 않는 땅 밑에서 꿈틀거리는 ‘은밀한 울림’으로 지구촌을 위로한다. 고단한 현실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내면의 평온과 생명에 대한 경외를 되찾아주는 예술적 안식처로서 작품은 고정된 상(象)이 아니라 우리 곁에서 흐르고 있는 거대한 생명의 숨결, 기운생동(氣韻生動) 그 자체로 다가온다.

그가 빗은 창조물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한국적 사유의 깊이를 서구적 조형 형식에 담아낸 ‘영혼의 건축’이다. 작품이 전하는 생명의 에너지는 국경과 문화를 넘어 전 인류의 마음속에 흐르는 ‘우주적 일관성’을 일깨우며, 개인적인 경험이 어떻게 가장 세계적이고 보편적인 예술적 성취로 나아갈 수 있는지를, 그리고 한국 미술이 나아가야 할 진정한 세계화의 이정표를 제시하고 있다. 오늘날 ‘K-아트’가 지향해야 할 진정한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전범(典範)이라 할 수 있다.

 

“더불어 하나가 되어 성장해온 아름답고 창조적인 삶을 지인들과 함께 공유하고 나누고자 합니다. 색의 공간, 형상들과 함께 춤추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길 간절히 바라며, 마음 졸이며 기다립니다….” 2008.9 작가 노트 中 발췌

 

 

 

5. Nature in, Nature out: 안팎의 경계를 지운 무한한 생명의 지평

표갤러리에서 선보이는 이번 전시 ‘Nature in, Nature out’은 조각가 김태수가 청평의 자연 속에서 보낸 7년의 세월이 응축된 결과물이자, 그의 예술 세계가 ‘관찰된 자연’에서 ‘체득된 본질’로 진화했음을 알리는 선언이다. 전시명에서 드러나듯, 작가는 이제 내면으로 수렴된 자연의 생명력(Nature in)을 조형적 확신을 통해 세상 밖으로 거침없이 발산(Nature out)하며, 안과 밖의 경계가 사라진 거대한 생명의 순환 고리를 완성한다.

작가는 청평 작업실에서의 삶을 통해 사회적 관념이나 외부의 소음에서 벗어나 오롯이 자기 내면의 소리에 침잠해왔다. 그에게 자연은 더 이상 묘사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삶과 일치된 스승이다. 작가 노트에서 밝힌 것처럼, 그는 씨앗이 토양과 바람을 만나 꽃을 피우는 우주의 법칙이 곧 자신의 삶과 작업 과정에도 동일하게 적용됨을 깨달았다. 스스로를 ‘내면에 잠재된 씨앗’으로 규정한 작가는, 조각이라는 행위를 통해 그 씨앗이 품은 무한한 가능성을 공간 속에 실체화한다.

특히 이번 전시의 정서적 기저에는 몽골 '차강 소브라가'의 광활한 지평선에서 마주한 영감이 깊게 뿌리내리고 있다. 끝없이 펼쳐진 대자연 앞에서 느낀 순수한 자유와 생명의 진수는, 그의 조형 언어를 한층 더 과감하고 근원적인 방향으로 이끌었다. 2차원의 판재가 겹겹이 쌓여 3차원의 유기적 생명체로 치솟는 과정은, 지평선 너머에서 솟아오르는 태양의 박동처럼 강렬하다. 이는 단순한 형상의 창조를 넘어, 보이지 않는 생명의 속성을 가시적인 믿음의 형태로 치환해내는 '영성적 발현'에 가깝다.

5월, 만물의 호흡이 느껴지는 시점에서 개최되는 전시 ‘Nature in, Nature out’은 작가가 삶의 궤적에서 길어 올린 '벅차오름'과 '설레임'의 기록이다. 상상이라는 씨앗이 믿음이라는 양분을 먹고 예술이라는 꽃으로 피어나는 이 과정은, 작가 개인의 성장을 넘어 관객들에게도 각자의 내면에 잠든 생명력을 일깨우는 강력한 에너지를 전한다. 김태수의 조각은 이제 닫힌 공간의 오브제를 넘어, 대지의 숨결을 세상 밖으로 실어 나르는 거대한 통로가 되어 우리 앞에 서 있다. 그가 세운 이 생명의 지평 위에서, 우리는 비로소 자연과 내가 하나로 공명하는 진정한 '기운생동'의 순간을 함께하게 된다.

 

“씨앗이라는 믿음을 근간에 두고 상상하고 구현해가는 일은 오롯이 두 감정 사이를 오가게 한다, 그 반복되는 과정에서 한뼘 한뼘 자라나는 나를 지켜본다. 이러한 일상이 나의 기쁨이고, 나의 삶이고, 나의 조각이다.“ 2026.4 작가 노트 中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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