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생태, 그 가늠할 수 없는 크기와 깊이
고 충 환 ㅣ 미술평론
주제 혹은 소재의 측면에서 김태수의 조각이 변화해온 과정을 보면 먼저 인체에서 자연으로, 그리고 재차 인간과 자연 모두를 아우르는 보다 큰 개념인 생태를 주제화하는 것으로 연이어지고 있다. 비록 시기적으로 구별되는 이 주제들은 그러나 거시적인 관점에서 보면 서로 유기적으로 연속된다는 점에서 일관성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보거나, 인간이나 자연 모두 생태환경의 한 부분으로서 포섭되는 것을 생각하면 사실상 생태라는 대 주제를 각각 인간이라는 관점에서 그리고 자연이라는 관점에서 풀어낸 경우라 하겠다. 물론 이처럼 생태를 전제로 놓을 경우에 실제로 조각이 제작된 시기를 거꾸로 되짚어 재구성한다는 문제가 있지만, 적어도 인간 혹은 인체를 주제로 하던 초기에서부터 이미 그 이면에는 생태에 대한 의식이 뒷받침되고 있었던 것으로 봐야 하고, 뒤늦게 생태 자체가 별개의 주제로서 부각된 경우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각각 인간 따로 자연 따로 접근하던 것이 차후에 생태라는 주제 아래 종합되는 경우로 볼 수도 있겠다.
세부적으로 유학(1987-1992)을 전후한 시기에는 주로 사실적인 인체조각이 지배적이다. 그리고 이후 인체는 사실성을 바탕으로 점차 양식화되고 반쯤은 추상화된 형태로 변화해 가는데, 대략 2002년까지가 이 시기에 해당한다. 당시 주제의식으로는 주로 삶을 관조적인 입장에서 바라보는 태도가 확인된다. 단독상의 경우가 내면을 투시하는 자기반성적인 경향성을 보여주고 있다면, 두셋 사람이 함께 어우러진 형상은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 주목한 경우로 보인다. 한편으로 자기 내면으로 숨어들면서, 다르게는 타자와의 관계에 의해 정의되는 주체의 자의식을 형상화한 것이다. 각각 고립된 섬으로서의 자의식과, 관계의 맥락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대타자적 존재로서의 자의식이라는 이중성 내지는 양면성으로 나타난 인간의 존재론적 조건을 상형한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그리고 자연소재로 넘어가는데, 곧장 건너뛰지는 않는다. 인체와 자연소재를 이어주는 일종의 과도기에 해당하는 시기가 있는데, 2003년 즈음의 소위 풍경조각의 경향성이 여기에 해당한다. 인체를 위한 배경화면으로서 풍경적인 요소가 들어오게 되고, 풍경이 전통적인 좌대의 의미기능을 대체하게 되면서 자연스레 조각의 범주영역이 공간설치작업으로까지 확장된다. 이후 작업의 성격 여하에 따라서 여전히 좌대가 부수적인 의미기능을 하기도 하고, 아예 좌대가 없는 본격적인 공간설치 내지는 연출이 병행되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인체에 풍경적인 요소가 결부됨으로써 그 표현영역이 풍경조각으로까지 확장될 뿐만 아니라, 공간설치작업으로 연이어질 수 있는 사실상의 계기를 열었고, 그 과정에서 좌대의 의미기능을 재고하게끔 유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주지하다시피 현대조각은 좌대 이전과 이후로 가름될 정도로 결정적인 부분이 있고, 현대조각의 표현영역이 이처럼 다양해질 수 있었던 것도 알고 보면 전통적인 조각으로부터 좌대가 사라진 탓에 가능해진 일이다. 조각과 공간을 좌대가 매개시켜주던 것에서 조각이 공간과 직접 관계를 만들어가야 하는 것으로 조각의 생리나 그 존재방식이 바뀐 것이다.
여하튼 이 시기 이후 본격적인 자연소재로 넘어가는데, 이때 작가가 주목한 자연소재 내지는 자연현상이 바로 발아하는 싹이며, 씨앗이 이제 막 싹을 틔워 본격적인 생장을 준비하는 극적인 순간을 포착한 것이다. 사람들이 기억하는 자연형상은 대개 이미 생육을 마친 경우이다. 완전히 성숙한 자연을 형상 내지는 구상적인 형태로 기억한다는 말이다. 이에 반해 씨앗 자체나 더욱이 씨앗이 발아하는 순간은 그 형태가 상대적으로 가변적인데, 아마도 어떻게 생장할지 그 형태를 가늠할 수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애매한 성질이 작가로 하여금 적어도 외관상 추상적으로 보이는 형태에 천착하고 심화하고 다변화하게 한다. 보통 추상이라고 하면 순수하게 관념적인 형상을 떠올리기가 쉬운데, 작가의 경우에는 이처럼 자연 자체의 본성으로부터 끌어낸 추상적 형태란 점에서 분명 다르다. 유기체의 본성을 따른, 일종의 유기적 추상이라고나 할까. 여하튼 이런 저간의 사정이 작가로 하여금 자연의 본성 곧 자연성을 특정의 형태에 가두지 않고 비교적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게 해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씨앗은 그 속에 생명을 품고 있다. 말하자면 작가는 씨앗 자체가 아니라 씨앗을 통해서 사실은 그것이 품고 있는 생명 내지는 생명현상을 표현하고 싶은 것이다. 이처럼 궁극적인 지향이 씨앗이 아닌 생명이라면 문제는 더 확실해진다. 즉 생명에 정해진 형태가 따로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가능한 모든 형태에 대해 열려 있는 생명현상을 추상적인 문법을 빌려 표현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여기에 씨앗으로 나타난 가시적인 형태 이면의 생명이라는 비가시적인 현상마저 가시적인 표층 위로 밀어 올려 암시할 수가 있다면 작가의 조각에 엿보이는 추상적인 형태, 엄밀하게는 유기적 추상 혹은 유기체적 추상형태가 갖는 당위성은 분명해진다. 작가는 바로 이 지점을 겨냥하고 있고, 그 겨냥은 상당할 정도로 성공적으로 보인다. 시기적으로는 자연소재를 본격적으로 도입하기 시작한 2004년 이후부터 적어도 외관상 생태를 주제로 한, 그래서 그 영역과 범주가 단순한 자연소재보다 더 포괄적이게 된 현재 작업에 이르기까지 그 표상형식(생명의 표상으로서의 발아하는 씨앗)이 심화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작가의 조각은 또 한 번의 결정적인 전기를 맞는데, 2006년 버몬트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초대 참여한 것이 그 계기가 되어졌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부터 소위 판재조각이 등장하는데, 덩달아 재료도 이전의 브론즈와 석재로부터 나무와 철판, 스테인리스스틸과 아크릴의 일종인 포맥스 소재 등 다양해진다. 처음에는 크고 작은 가공한 목판을 중첩시키거나 배열하는 방법으로 발아하는 씨앗이나 볍씨 그리고 종자 등 자연 모티브를 형상화하다가, 이후 점차 본격적인 판재조각으로 부를 만한 경우로 진화해간다. 철판이나 포맥스 소재를 슬라이스 형태로 자른 후, 그것들을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면서 일종의 지지대 역할을 하는 판 위에 휘어서 중첩시켜나가는 방법으로 하나의 전체 형상을 재구성해낸 것이다. 그 형상은 한눈에도 건축적이고 구조적이고 공작성이 강한 편인데, 환조의 전형적인 형식에 천착한 전작과는 뚜렷이 구별돼 보인다.
주지하다시피 전통적인 조각의 본성으로 치자면 단연 양감, 매스, 덩어리를 꼽을 수가 있다. 인체조각이나 자연소재를 다룬 초기 형태가 이런 매스에 천착한 것이었고, 브론즈와 석재는 그 형태를 표현하기에 적합한 재료가 되어주었다. 그러다가 이처럼 조각의 생리가 환조의 전형적인 형식으로부터 소위 판재조각으로 바뀌면서 재료도 덩달아 바뀐 것이다. 내용이 바뀌면서 형식이 바뀌고, 형식이 바뀌면서 이를 적절하게 표현하게 해줄 재료도 같이 바뀐 경우일 것이다. 좌대가 없는 조각을 통해서 조각의 표현영역을 공간설치작업으로까지 확장시킨 이후, 매스가 없는 조각을 통해서 조각의 생리를 재차 확장시킨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그리고 여기에 덧붙이자면 색채의 적극적인 사용을 들 수가 있다. 작가는 진작부터 조각에 채색을 도입한 편이었지만, 색채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그래서 색채가 형태를 돋보이게 해주는 결정적인 요소로서 작용한 것은 아마도 이 작업 이후가 되지 않을까 싶다. 이런 색채의 도입은 지금도 여전히 어느 정도는 색채에 대해서 인색한 편인 국내 조각계의 현실과 비교된다. 그렇게 비교되면서 오히려 작가의 조각을 더 또렷하게 부각하는 계기가 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빛의 도입 역시 기왕에 공간설치작업으로까지 확장된 작가의 조각의 생리를 더 유연하게 가져가는 한편으로, 장소특정성까지는 아니더라도 일종의 공간친화력을 중요한 한 특징으로서 자리매김하게 해준다.
그리고 작가는 2008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를 주제화한다. 주제도 그렇고 어느 정도는 형태 역시 일관성을 보여주면서 심화 내지는 다변화시켜가고 있는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형태도 그렇지만 특히 눈에 띄는 부분은 다름 아닌 주제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이를테면 국내적으로 1980년대 미술계의 화두로 치자면 이념일 것이며, 90년대 들어서는 몸이 될 것이다. 그리고 2000년대 들어서는 단연 에코 곧 생태가 시대정신의 열쇠말로서 등장한다.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작가가 지금여기의 시대정신을 의식하고 있거나 읽고 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앞서 살폈듯 기본적으론 판재조각을 변주하고 있는데, 독립된 조각을 위해서는 주로 철판에 채색한 조각의 경우가 많고, 상대적으로 휨의 정도가 강한 편인 평면작업을 위해서는 포맥스 소재를 사용한다. 평면작업은 벽면에 부착되거나 설치되는 것으로 인해 일종의 그림(일종의 드로잉 조각?)으로 볼 수도 있겠다. 평면과 입체의 경계를 넘나들고, 조각과 그림의 범주를 아우르고 있는 것.
흐르는 생태란 주제 속엔 자연의 본성이 들어있고 생명의 본성이 오롯하다. 흐르는 것은 변화한다. 변화하는 것은 그 실체를 붙잡을 수가 없다. 다만 고정된 한 순간을 포착할 수가 있을 뿐인데, 이때마저 사실은 자연의 본성을 그르치고서야 가능한 일이다. 순간을 붙잡으려면 자연을 정지시켜야하는데, 이때의 정지가 자연의 본성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여하튼 자연을 순간적으로나마 고정시키는 것은 결국 인간의 인식에서 일어나는 일일 뿐, 그 일로부터 자연은 무감하고 무심하고 무관하다. 어쩌면 흐르는 생태라는 주제로 붙잡은 작가의 작업들은 사실은 그 자체로서보다는 이를 통해서 암시되는 어떤 경지, 비가시적인 어떤 차원, 이를테면 인간과 자연을 아우르는 생태환경의 가늠할 수 없는 크기와 깊이를 보여주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