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의 색채와 광휘
조 은 정 ㅣ 미술평론가, 고려대학교 초빙교수
현대조각은 그것이 바람, 공기와 같은 비물질일 때조차도 물질의 언어를 사용한다. 허상을 넘어선 공간에 존재하는 속성은 여전히 조각에서는 유효한 지점인 것 같다. 조각가 김태수가 모든 물질을 자신의 작품에 끌여들여 표현요소로 삼는 것은 그래서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다양성도 단계가 있는 법. 그는 레진, 용접, 스테인리스 스틸 등 손에 닿는 모든 재료를 작품화하고 구축한다. 그리하여 김태수의 조각은 기하와 구상, 자연적 재료와 새로운 물질 그리고 이성적 형태와 자연의 상기(想起)라는 상반되면서도 필연적인 관계성을 드러낸다. 새로운 형태와 색상은 추상이지만 그 근원은 자연 어딘가에서 발원한 구상적인 것이다. 칸칸이 대조적이며 자연계에 존재하지 않는 색채를 사용함으로써 추상성을 드러내는 그의 조각은 면적인 동시에 선적이며 또한 입체적이다. 다양한 차원의 종합과 같은 상황은 그동안 그가 추구해온 조각의 변화 안에서 이미 예견된 것이기도 하다.
「공공미술포털」 사이트에 게재된 김태수의 조각 중에는 본인 것임에도 동명이인인 작가의 작품일 것이라 지레 짐작케 하는 경우들이 제법 있다. 십여 년의 간격을 두고 그의 작업이 급격히 추상화한 것이 사실이다. 그 추상화는 현상에 대한 감각적 번역을 거친 결과이다. 이를테면 일반적인 명사인 자연의 ‘소리’는 ‘흐름’으로 변화하였다. 이는 그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현상에서 본질로 이동한 것이다. 또한 그것은 세계의 기반인 자연과 생명의 에너지 변환 구조를 파악한 것을 의미한다. 바람은 소리였다가 소리의 힘인 에너지의 본원적인 흐름으로 해석되고 있는 것이다. 현상에서 원리로. 작품은 작가를 생의 비밀에 다가가게 하는 수련의 도구이자 한 세계의 창조주로서 가치를 드러내는 시금석이다. 관객은 그 도구를 통해 미를 즐기는 유목민이 될 수도, 스스로 길을 나서는 구도자가 될 수도, 선지자의 돌처럼 문득 눈에 들어온 형상 하나로 세계를 파악하게 되는 내부의 능력을 만날 수도 있다.
감염증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인간이 주목하게 된 것은 자연이다. 그것은 현상으로서 자연 뿐만 아니라 삶의 장소로서의 자연이기도 하여 김태수의 작품 가 더욱 특별하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에너지로서 파악되는 자연의 흐름, 자연의 힘을 바꾸어 우리 삶에 이용하기도 하지만 ‘자연의 흐름에 몸을 맡긴다’는 인간이 지켜야 할 규약괴도 같은 것이다. 그 ‘eco’에 대한 이해와 평가가 우리 삶을 변화시킬 것이다.
김태수의 ‘eco’는 작품의 외형을 통해 실체를 드러낸다. 그의 독특한 색채는 어쩌면 에너지에 대한 이해와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힘은 저절로 솟아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독특한 색채감각 즉 빨강과 초록 같은 보색이 그의 작품에서는 스스럼 없이 부딪친다. 이 강렬한 만남-부딪침이 공기중에서 일어난다면 기압을 형성하고 공기의 흐름을 변화시키고 바닷물을 들쑤셔놓아 바위를 넘어 모래사장을 포말이 덮어버리게 하는 힘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태양의 힘을 현대사회에서 이렇게 직시한 적은 없었다. 그것은 태양열 에너지라는 판으로 인식되는 존재였지 암각화에서처럼 소용돌이치고 패이고 구불거리는 어떤 것은 아니었다. 현대의 모든 이기(利器)를 이용한 김태수의 조각이 신화적 세계와 접속된다는 점은 기이하기까지 하다.
또한 강렬한 색의 대비는 양감과 질감에 집중하기 쉬운 조각에 회화적 속성을 부여한다. 강렬한 색채 덕분에 면을 자르고 용접한 부분부분이 평면임을 인지하게 된다. 그 단절은 공간에 선을 긋듯 색을 긋는다. 그어진 선들은 켜를 이루어 하나의 조직을 만들어내고 그 뭉쳐진 공간에 위치한 조직을 우리는 조각이라 지칭한다. 너무나 또렷하고 확실한 그 단절의 선들은 컴퓨터로 계산되고 기계로 절삭된 것이다. 표면은 ‘도장(塗裝)’되었고 손으로는 다루기 어려운 재료들도 쉽게 구조화 되어 공간에 놓이거나 걸리거나 바닥에 펼쳐졌다. 이즈음 드는 생각은 조각이란 무엇인가라는 원초적인 질문이다. 우리가 조각에서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기도 하다.
“패턴이 불규칙한 타원을 이루면서 커지는 것은 삼라만상의 조화, 그리고 인간과 자연을 어우르는 생태환경의 가늠할 수 없는 크기와 깊이를 상징한다.”
겹겹이 쌓이거나 늘려진 선들이 존재하는 작품을 설명하는 작가의 언어이다. 불규칙한 타원이 손을 통해 구조화되어 똑 떨어지는 지점을 만들기는 쉽지 않지만, 데이터를 넣고, 컴퓨터로 계산된 곡면들은 언제나 명확히 특정 지점을 찾아 잘라내고 결합할 수 있게 한다. 평면의 지지체에서 용점을 통해 좌우로 펼쳐진 조형은 공간에 존재하는 볼륨으로 완성되지만, 애초의 시작은 면에서 그리고 선에서 시작된 것이다. 수직으로 서 양편으로 펼쳐진 조각의 구조는 씨방에서 싹이 자라나는 방식을 유추시키며 관찰자로 하여금 싹, 생명, 씨앗 그리고 어머니와 아기 같은 과거 그의 작품의 형태를 상기시킨다. 형태의 환기는 에너지의 환원을 유추하게 하는데 생명의 근원과 순환에 대한 이해를 도모시키기 때문이다. 완결되지 않은 소용돌이치는 형태들은 그 불완전함으로 인하여 가장 완벽하다는 생명을 상기케 하는 모순에 직면하게 한다.
그런데 사실 생각해보면 김태수의 조각은 모순투성이다. 에너지, 생명성을 비생명의 상징인 기하적 계산과 기계에 의해 구현하고 에너지의 원천, 즉 살아있는 모든 것은 움직이는 속성을 자연에 존재하지 않는 강렬한 산업 도료로 가시화한다. 생명을 상징하는 기호와 원리를 비생명성의 언어인 철, 레진 등으로 조형한다. 삼각형, 원형, 파동형, 물론 직선을 포함한 모든 요소들은 기계적인 언어들이다, 그런데 라 하고 우리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다. 우리가 이해하는 세계에서 공기의 흐름을 드러내는 방법은 바람결에 날리는 머리카락 혹은 모자가 날아가는 들판과 같은 표현으로도 가능하지만 기압골의 이동을 보여주는 기상도를 통해서도 가능하다. 오히려 노랫말 속 날아가는 모자를 잡기 위해 손을 벋치기보다는 모니터 속 팽팽한 등고선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더 쉬운 일이 되어버렸다.
세상은 변화한다. 그 변화에 맞추기 위해 무한 달렸다. 점점 차오르는 숨이지만 그 쳇바퀴에서 누구도 내려올 수 없었다. 옆의 다른 쳇바퀴가 무한히 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누군가 혹은 어느 국가가 그 쳇바퀴에서 내려온다는 것은 일상의 탈주가 아닌 달리기의 낙오자로 치부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감염증으로 모든 것이 멈춰진 시간이 찾아왔고 스윽 발을 벋어 땅에 딛는 일이 가능해졌을 때, 달리느라 못 본 것들이 주변에 내려앉았다. 파란 하늘과 재채기를 불러오지 않는 공기 그리고 작은 공간에서 함께 부대끼며 요리를 하고 나누어 먹을 가족들 이외에도 무수한 것들이 있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빛을 향한 속도인 줄 알았으나 자연의 파괴행위에 불과한 것이었음을 깨달은 순간, 전기와 수소와 태양이 에너지원임을 다시 인식한다. 그리고 살아있는 것들에 대한 사랑, 생명의 법칙에 대한 경외감에 몸을 떨게 된다. 그 떨림이야말로 세계를 있게 하는 진동과 같은 파장이 아니던가. 김태수의 유연한 곡선들은 파동이며 모든 생명의 진동을 가시화한 것이다. 데이터란 삭막하고 허구의 수리(數理)가 아니라 사실의 결과물을 수치화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김태수의 디지털적 처리를 통과한 이미지는 감각을 통해 인지한 생명의 흐름을 디지털로 고착시켜 가시화한 것이다. 그의 유연한 형상들은 새싹에서 발원한 에너지, 우주의 진동과 같은 파장으로서 이해되어도 무방할 것이다. 자연의 실재와 사이에 작가의 번역과 우리의 이해가 자리한다.
회화는 벽에 위치한다. 그 벽은 시선의 각도를 한정하고 관찰자의 수를 조정한다. 조각은 공간에 존재함으로써 스스로 열리고 관람자를 불러모은다. 광장에서 민주주의가, 사람의 일들이 벌어지듯 조각은 사람을 불러모으고 개개의 이해를 허락한다. 광장에 선 조각, 사람들은 새로움을 추구하면서도 익숙함을 찾으려 한다. 전통적인 조각 개념에서 현저히 다르기만 한 것은 결코 아닌 지지대와 양날게 이외에 그의 작품이 주는 익숙함은 조각에서는 다소 이색적인 바로 그 색채이다. 디지털화한 기기 속 색상에 익숙한 현대인의 색채 감각이 그의 작업에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을 내뱉는다. 는 그렇게 평면과 입체, 색채와 빛 사이에서 현재 지금의 우리를 바라보게 한다.